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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골퍼
라오스 골프 투어에서는 관광이 덤. 본문
요즘은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라오스 비엔티안의 골프장에서 한국 골프 투어객들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라오스 골프 투어의 경우에는 2박 3일이나 3박 4일의 단기간 일정으로 오는 팀들이 대부분이다. 태국의 칸짜나부리나 치앙마이처럼 장박의 개념으로 해외 골프를 즐기는 것이 아닌 며칠간의 짧은 기간에 콩 볶듯이 라운드를 돌고 가는 골퍼들 위주여서 - 원래 골프텔들이 거의 부재한 라오스이기도 하지만 - 시내의 고급 호텔에서 골프장을 오가며 매일 18홀 정도의 플레이가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시내의 호텔을 숙소로 지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골프텔에서 갇혀 지내며 라운드를 하느라 바깥 구경이 쉽지 않은 태국 골프 투어와는 달리 라오스 골프 투어의 경우에는 비엔티안 시내 구경 정도는 꽤 자유로울 수 있어 그나마 장점이라 볼 수 있다. 18홀 플레이를 마치고 저녁 식사 전 마사지를 받기도 하지만 좀 더 시간을 만들면 메콩강 언저리의 야시장으로 나가 라오스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때론 이른 티오프로 18홀 플레이만 한다면 오후 시간이 그대로 비어 반나절 비엔티안 시내 관광이 가능한 것도 라오스 골프 투어의 매력 중 하나이다. 뭐 물론 오후의 찌는듯한 태양 아래에서 태국이나 미얀마 같은 이웃 국가들의 웅장한 규모의 사원들에 비하면 지극히 초라하게 보이는 고만고만한 사원이나 황금색 페인트로 그럴듯하게 칠해진 처음 마주치면 꽤 멋져보이는 커다란 불탑을 보고 나서는 후회하는 이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가끔 라오스가 생각날 때 어쩌면 골프장보다는 덤으로 가본 관광지가 기억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고만고만한 사원이나 비엔티안의 것보다 규모는 작지만 황금색으로 칠해진 불탑들은 라오스의 다른 도시에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시내의 대로 한가운데 서 있는 “빠뚜싸이”라 부르는 콘크리트 구조물은 단연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한국말로 “빠뚜”는 '문', “싸이”는 '승리'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다른 라오스어로는 “아눗싸와리”라고도 부르며 '전승기념비'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빠뚜싸이의 자세한 내용은 아래 유튜브 영상을 참조하시오.)
프랑스는 캄보디아, 베트남에 이어 19세기 말 태국이 식민지배 중이던 라오스마저 시암(태국 왕조)을 협박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토로 만들었다. 이후 라오스는 1940년경 잠시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었지만 1954년 프랑스군이 베트남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에게 대패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완전히 철수하기 전까지 약 60여 년의 기간 동안 프랑스에 수탈받은 역사가 있다.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미국이 그 뒤를 이어받고 결국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월남전이 시작된다. 미군은 베트남의 주변국(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멀리는 말레이시아까지)에 군사 기지들을 건설했었는데 라오스에도 미국 공군을 위한 비행기 활주로를 원했다고 한다. 하여 당시 라오스의 왕과 지배층은 막대한 달러와 시멘트를 미군에게 원조 명목으로 지원받는다.
그런데 그들(라오스 지배계층)은 지원받은 돈과 시멘트 대부분을 생뚱맞게도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그대로 닮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데 거의 다 써버렸다고 한다. 물론 건축물 안쪽 천장의 부조로 되어있는 힌두 신화나 토속 신화의 형상은 파리의 개선문과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원조를 해준 미군들이 활주로 대신 세워진 라오스식 개선문을 봤을 때의 황당함이란 그때 직접 보진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오죽하면 미군들이 “수직 활주로”라고 비아냥거렸다는 후일담도 있다.
얼마 전까지 공사 중 - 현재 개장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던 옛 총독부 건물을 개조한 비엔티안 박물관 2층의 전시된 사진과 그림들 대부분은 60여 년 프랑스 식민지배가 당시 라오스인들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었나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 초의 라오스 지배층은 무슨 생각으로 수도 한복판에 프랑스 개선문을 흉내를 낸 건축물을 만들었을까? 그에 관해선 오랜 시간 동안에도 주위 현지인 중 아무도 정확한 답을 주지 않아 스스로 추정컨대 1973년 미국이 월남전에서 물러나고 공산화된 베트남이 소수의 라오스 공산당원들과 함께 비엔티안으로 무혈입성하기 전까지 라오스 내의 지배층은 프랑스가 철수하고 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된 상태여서 친프랑스파들이 여전히 라오스 실권을 잡고 있었고 그러한 그들은 다수가 젊은 시절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뼛속 깊이 프랑스에 대한 향수로 젖어들어 있어 그런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공산주의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라오스 북동쪽 산악지대에 숨어있던 공산주의자들과 반대파인 기득권층(친프랑스파)을 당연히 미국 정부가 지지세력으로 여겼을 것이고 그로 인해 독립 이후의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은 이행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고 본다.
그래서 손님들에게 “빠뚜싸이”를 안내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음은 이런 추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며칠 전 웹툰 작가인 윤모 씨라는 작자가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독립운동가들과 그 자손들을 비하하는 내용의 글을 SNS에 올렸다는 보도를 보고 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보통의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평소에도 그의 편향된 사고에 기반하여 작성된 글과 영상물에 필자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불편해 했었다. 현재 다수의 평범한 이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소수의 뜻있는 이들의 값진 희생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희생한 그분들을 욕되게 하는 파렴치한 저런 작자들을 방관하고 눈감으면 미래의 안락한 삶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우리 대한민국 사회도 ’진정한 과거사 청산의 시대‘가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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